에세이

10.이름일화

genteiko 2013. 6. 4. 13:27

 

 

 

 

  사람의 이름은 그와 다른 사람을 구별하기 위해 다는 일종의 부호일 따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이름에 많이 신경을 쓴다.

  이름이 운명을 결정하는 것도 아니고 이름이 멋지다고, 이름이 예쁘다고, 멋지고 예쁜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닌데 우리는 이름에 집착한다. 아마 좋고 아름다운 것을 지향하는 인간본능의 표현일 것이다.

  우리 조선민족은 흔히 상서로운 사물의 한자에서 이름을 따온다. 남자아이의 이름에는 소나무같이 굳세라고 <송(松)>자를, 범같이 용맹하라고 <호(虎)>자를, 영웅호걸이 되라고 <걸(杰)>자를, 현명한 사람이 되라고 <현(賢)>자를…, 그리고 여자아이들에게는 꽃처럼 고우라고 <화(花)>자를, 향초같이 향기로우라고 <향(香)>자를, 옥처럼 맑으라고 <옥(玉)>자를, 공주같이 예쁘고 귀하라고 <희(姬)>자를 많이 달아준다.

  아마 말을 타고 활을 쏘며 전장에서 달리던 고구려인들의 상무정신(尙武)이 민족의 혈관 속에 흐르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남자는 강하고 여자는 아름다워야 한다는 민족적 미학이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하긴 나도 둘째 언니가 조카애를 낳았을 때 태몽에 기이한 짐승을 보았다고 하기에 기린이라는 <린(麟)>자를 달아주라고 건의했는데 그것이 그대로 채택되어 지금도 이름이 최린(崔麟)이다. 그런데 이 한자가 어려워서 사람들이 쉽게 쓰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서 그 애가 직접 자기가 써 보이어야 하는 일이 많았다. 그래서 이름을 지어준 자로서 책임감을 느낀 내가 불편하지 않은가하고 물으니 의외로 남들과 달라서 좋다고 하는 것이었었다. 그래서 마음이 좀 놓이기는 했지만 그 애가 기린같이 속세를 초탈한, 그러면서 현명하고 따뜻한 사람이 되었으면 하고 바랐다.

  이런 이름의 취향은 또 시대를 따라서 변하는지라 이름만 보아도 그가 어느 시대 사람인지 알 수 있다.

해방 전에는 돌쇠, 첫째, 쌍가매, 꽃분이…, 이렇게 고유조선어에서 따온 이름이 많았는데 해방 후에는 한자로 된 이름을 많이 지었다. 우리 남편의 형제들 이름만 보아도 만초(萬初), 춘남(春男), 해철(海哲), 해강(海江), 진짜 멋진 이름들이다.

  문화대혁명 때에는 사상이 붉은 사람이 되라고 <홍(紅)>자와 혁명이라는 <혁(革)자를 많이 부치었다. 그래서 문혁(文革), 홍화(紅花), 향양(向陽)…, 이런 이름이 많았다.

  80~90년대는 홍콩 대만의 영향으로 외자이름을 짓는 것이 유행이었다. 단(丹), 령(鈴)…,그리고 부를 때는 단단, 령령하고 애명으로 불렀다.

  우리 아버지는 큰언니와 오빠에게는 류드밀라, 와짐이라는 러시아 이름을 달아주었지만 둘째 어니와 나에게는 숙자(淑子), 정자(貞子)라는 조선이름을 달아주었다. 그런데 희한한 것은 우리 집 식구들의 이름만 읽어보아도 우리 민족의 백년 이민역사가 그대로 보인다는 것이다.

  19세기 말~20세기 초에 수많은 조선 사람들이 중국, 러시아에 이주하였다. 우리 아버지는 원래 조선에서 태어났기에 종가의 규례에 따라 ‘엄상준’이라는 이름을 받게 되었고 후에 중국만주에 이민했고 항일유격대를 따라 이동하다나니 국경을 넘어 러시아에 가게 되었다. 어머니는 아예 러시아에서 태어난 재러시아 고려인2세인지라 자연히 ‘리자’라는 러시아 이름을 갖게 되었고 위의 두 아이의 이름도 러시아 이름으로 짓게 되었다. 둘째 언니는 러시아에서 태어나기는 했지만 그때 벌써 중국에 들어올 준비를 하던 때라 중국조선족의 이름을 지어주게 되었고 중국에서 태어난 나에게도 당연히 같은 유(類)의 이름이 지어졌다.

  그런데 이 이름 역시 순수한 조선 이름이 아니다. 일본식민지 역사를 갖고 있는 우리 민족은 이러저런 면에서 일본문화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는데 그러다나니 이름 끝에 <자(子)>자를 붙이는 일본사람들의 이름 짓는 방법을 그대로 쓰는 사람이 많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내 이름에도 그 역사의 흔적이 남아있게 된 것이다.

  그런데 내 이름에 이렇게 역사의 낙인이 있어서라기보다 예뻐 보이지 않아서 나는 내 이름을 좋아하지 않았다.

  나의 어린 시절, 우리 집 창턱에는 언제나 난이 놓여있었다. 해마다 유월이면 빨간 꽃이 곱게 피던 기억이 지금도 또렷한데 그 때 나는 내 이름도 다른 애들처럼 꽃 이름을 따서 ‘란화(蘭花)’라고 고쳤으면 했다. 그러나 그게 어디 내 마음대로 되는 일인가. 누구도 없을 때 혼자 불러보다가 그만두고 말았다.

소학교에 들어가 문화대혁명이 일어나고 모두들 혁명적인 이름을 붙일 때 나도 그런 이름을 달아보고 싶었다. 마침 평양에 있는 언니가 우리 식솔 전부 앞으로 여행 동의서를 보내왔다. 이제야말로 이름을 고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왔다고 여긴 나는 어머니가 일보러 나간 틈을 타서 이름 란에 적힌 내 이름위에 빨간 색연필로 ‘홍련(紅蓮)’이라 고쳐 적어 넣었다.

  내 이름을 고치고보니 이번에는 언니 이름도 눈에 거슬렸다. 그럼 뭐라 고치지, 내가 홍련이니 『장화홍련전』을 본 따서 ‘장화’는 어떨까. 그런데 불러보니 발에 신는 ‘장화’와 발음이 같아서 어감이 좋지 않았다. 이 궁리 저 궁리 하던 중에 그때 한창 방영 중이던 영화 주인공의 이름 ‘홍매(紅梅)가 생각났다. 그래서 언니 이름위에 ’홍매‘라고 꼭꼭 박아 써넣었다.

  이젠 새 이름을 달고 출국하게 되었다고 기뻐하는데 이 일이 화를 불러 올 줄이야. 집에 돌아와 동의서 위에 고쳐진 이름을 발견한 어머니가 불같이 화를 냈다. 어머니가 부랴부랴 고무로 지워보았지만 빨간색이 번지기만 할 뿐 깨끗이 지워지지 않았다. 별 수 없이 그대로 공안국 외사과에 가지고 가보였더니 그 자리가 도장자리 같다고 동의서는 무효처리 당하였다. 어머니가 그토록 기다리시던 큰언니가 있는 평양에로의 이민은 물 건너가고 말았다.

  그러고 얼마 안 있어 아버지가 홍위병들에게 잡혀 들어가고 언니는 농촌에 내려가게 되었다. 매일 ‘투쟁’을 맞느라 만신창이 된 아버지를 보며 나는 얼마나 자책감에 시달렸는지 모른다. 그때 내가 이름을 고치지만 않았더라면 우리는 지금쯤 평양에 가있을 것이고 그랬다면 아버지가 잡혀가는 일도 언니가 농촌에 쫓겨 가는 일도 없었을 것이고 어머니가 매일 눈물로 세월을 보내며 마음고생 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니깐. 내가 우리 집에 재난을 갖다 준 장본인이 된 것 같아서 이름을 고친 내 손을 끊어버리고 싶었다. 어린 마음에 누구에게 하소연도 못하고 혼자 아파하던 일이 잊혀 지지 않는다.

  그래도 세월이 흘러 세상이 바뀌고 나는 대학생이 되었다. 그런데 이름 고치는 고질이 또 도질 줄이야. 문학을 배우고 문학가가 되고 싶어지니 내 이름이 촌스러워 보이어 내 이미지와도 맞는 그런 멋진 이름으로 고치고 싶었다. 만약 이름을 고치지 못하면 필명이라도 멋지게 달아보고 싶었다. 그래서 고른 것이 눈 <설(雪)>자였다. 내 성이 <엄(嚴)>가이니 ‘엄동설한(嚴冬雪寒)이란 말에서 따왔는데 늘 차갑다는 말을 드는 내 이미지와도 딱 맞는 것 같았다. 거기에다 눈은 희고 깨끗하다는 이미지도 있으니 너무너무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친구들에게 보내는 편지에 ’설‘이라 사인했고 앨범에도 ’설‘이라 적어 넣었다.

  그런데 웃기는 것은 그때로부터 십년이 넘어 지난 지금도 나는 그냥 ‘엄정자’ 그대로 남아있다는 것이다. 작품의 필명도 원래 이름 그대로를 쓰고 있다.

  그렇다고 갑자기 내 이름이 마음에 들어서 그대로 쓴 것은 아니었다. 내 딸의 이름을 지어보기 전까지는 늘 마음에 안 들었지만 흐름에 따르다나니 그대로 쓰고 있었을 뿐이다.

  내가 동씨가문의 셋째 며느리로 들어가서 딸애를 낳았을 때, 딸애는 가문의 아홉 번째 손녀였다. 남편이 아들로는 셋째이지만 위로 형님 누나가 넷이나 있었던 것이다. 수(秀), 매(梅), 명(明), 청(靑), 연(燕)…, 언니들의 이름을 다 빼고 그것도 성에 맞추어 짓자니 도무지 좋은 이름이 떠오르지 않았다.

  딸애가 태어난 지 한 달이 다 되어 가는데 딸애는 아직 이름이 없다. 매일 한자사전옥편을 뒤졌지만 딱히 마음에 드는 이름이 없었다. 그래도 애가 이름이 없이 지낼 수는 없는지라 애명으로 ‘똥애’라 불렀다. 남편은 예쁜 딸애를 천한 이름으로 부른다고 화를 냈고 놀러온 큰언니는 듣기 좋게 ‘동애’라고 고쳐 불렀다. 그래도 나는 너무 예쁜 딸애가 천지신명의 질투를 받을까 두려운 마음도 있었기에 귀할수록 천하게 부르라는 옛사람들의 가르침대로 그냥 ‘똥애’라고 불렀다. 그래서 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 딸애는 이 예쁘지 않은 애명을 계속 달고 다녀야 했다.

  그렇게 사전을 첫 장부터 마지막장까지 뒤지는 나날이 계속되던 날 내 눈에 <운(芸)>이라는 글자가 들어왔다. 남편 성(姓)인 <동(董)>자가 연꽃뿌리라는 뜻이었기에 꽃과 잎이 무성해진다는 <운(芸)>자를 붙이니 그 의미가 너무 좋았다. 진짜로 딸애가 동씨가문을 번영시킬 대목일지 모르는 일이 아닌가. 거기에다 <동>자는 천리초(千里草)라는 뜻도 있는데 <운>자가 향초이기도 하니 그 향기가 천리를 갈 것이니 얼마나 상서로운 이름인가. <동>은 또 감독할 동, 거둘 동이라고 하니 수많은 생명이라는 뜻인 <운>자하고 어울리면 운운중생(芸芸衆生)을 이끄는 사람이 될 것이니… 세상에 이것보다 더 좋은 이름이 어디에 또 있겠는가!

  그렇게 연구한 결과 <운(芸)>이라는 글자를 선택했는데 남편도 좋다고 해서 겨우 이름이 낙착되었다.

그렇게 고심하며 딸애 이름을 짓고 나니 우리 아버지도 내 이름을 지을 때 그렇게 심사숙고하셨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에게 <정(貞)>자를 달아줄 때는 마음이 곧고 품행이 단정하고 절개가 있는 여인이 되기를 기대하셨을 텐데….

  내 이름이 예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내 모습이 예쁘지 못했다. 어지럽고 혼탁한 세상에 물젖어 얼룩지고 구겨지고 미워진 내 모습, <정(貞)>이라는 이름에 비추어보니 내가 너무 부족하고 부끄럽고 창피했다. 하지만 이름에 미치지 못한다고 이름을 버릴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이름을 탓할 것이 아니라 내 인간됨을 탓해야 했다. 이미 많이 얼룩진 나이지만 이제라도 내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어 보려 조금은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 그러려면 내 마음부터 바로 가져야 할 것이다. 내 이름이 책에 실릴 때, 내 이름이 서류 위에 사인될 때, 내 이름이 사람들의 입에 담길 때…, 그 이름에 어울린다는 말을 들을 수 있도록…

  그래야만 내게 <정>자를 달아준 아버지의 기대에 조금이라도 가까운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거창한 딸애의 이름 못지않게 너무 예쁜 내 이름, 너무 부담스럽기도 하지만 그래도 나를 편달해주는 이름이어서 그래서 나는 내 이름이 좋다.

  그래서 나는 앞으로도 쭉 엄정자로 살아갈 것이다.

『중학생보』, 199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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