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6.딸 떠나기

genteiko 2013. 6. 4. 14:46

 

 

 

  ‘오야하나레(親離れ)’, 한글로는 ‘부모 떠나기’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은 여태껏 부모의 집에서 살며 부모가 주는 돈으로 공부하고 부모가 해주는 밥을 먹으면서 자기 공부, 자기 일만 하면 되었던 자식들이 자기절로 돈을 벌고 자기 생활을 자기가 돌보기 시작함을 의미하는 말이다.

  일본에서는 젊은 사람들이 비교적 일찍 독립의 길에 나서는데 고등학생이 되면 벌써 아르바이트를 해서 자기 용돈이나, 지어 학비까지 버는 학생들이 많아서 슈퍼마켓에 가면 <아르바이트 모집, 고등학생 한 시간에 800엔>이라 쓴 광고들이 여기저기에 붙어있을 정도이다. 그래서 저녁 편이나 휴일에 물건 사러 가면 젊은 남학생들이 유니폼을 입고 레지에 줄느런히 서서 돈을 받고 있는 정경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이 색 바랜 아줌마들의 세상에 한줄기 생기를 그어주는 파란 물감 같아 색다른 그림이 아닐 수 없다.

  우리 딸애는 고등학교는 물론이고 대학교도 전철과 지하철로 다닐 수 있는 국립나고야대학을 다녀서 죽 우리와 함께 살아왔다. 만약 영국 런던에 유학만 가지 않았더라면 결혼할 때까지 그냥 이렇게 죽 같이 살았을 것이다.

  아무리 꼽아보아도 딸애가 혼자 있어본 적이라야 딱 두 번뿐이다. 다섯 살 때 놀러 온 삼촌에게 딸려 보내 할머니 집에 가 한 달 있은 일 하고, 대학교졸업여행으로 친구들과 같이 삐라미터가 있는 고대문명의 나라 이집트(Egypt)에 간 것이 전부다. 그래서 얼핏 보면 이번이 처음으로 부모 곁을 떠나는 것이어서 많이 당황하고 겁이 났을 것 같은데 기실 몹시 당황하고 걱정스러워진 것은 딸애가 아니라 내 쪽이었다. 딸애가 아니라 엄마인 내가 딸 떠날 준비가 안 된 것이다.

  옛날에 내가 결혼을 한다니 우리 시집 식구들은 남편에게 밥이나 제대로 끓여주겠는가고 걱정했고, 내 친구들은 “너 애를 낳고 키울 수 있겠니”하고 걱정하였다. 다행이 남편이 못하는 일이 없어서 밥 짓기는 남편에게서 배웠고 딸애도 건강하고 예쁘게 태어나준데다 똑똑하기까지 해서 아주 어릴 때부터 딸애는 나와 보호자의 역할이 뒤바뀔 때가 많았다. 무능한 쪽이 유능한 쪽에게 기대기 마련이고 그러다나니 그런대로 별 불편함이 없이 살아왔는데 딸애가 갑자기 옆에 없게 됐다. 그때부터 난감해지는 일이 생기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니 딸애가 옆에 없는 내 앞날에 걱정이 많다.

  어제만 해도 일본조선학회에서 급전화가 왔는데 논문요지가 들어있어야 할 CD에 아무 것도 들어있지 않으니 빨리 다시 보내라는 것이었다. 워낙 기계음치인 나인지라 글은 내가 썼지만 CD에 옮기는 것은 여태껏 딸애가 해주었었는데 그 딸애가 비행기를 타고도 13시간을 가야 하는 먼 영국 땅에 가있으니……, 처음으로 나절로 해보려 했지만 정작 하려니 절차가 생각 안 난다. 다행히 지금은 인터넷이 있어서 다급히 매신저로 딸애에게 구원을 청했다. 그 시각 딸애가 있는 곳은 한 밤중인지라 별빛 흐르는 지구의 다른 한 쪽 끝에서 딸애가 조름 실린 목소리로 지시하고 화창한 햇볕이 비쳐드는 이곳에서는 내가 그 지시대로 파일을 카피해서 CD에 넣었다. 이렇게 우주공간을 넘나들며 만든 파일이 어디가 잘못되었는지 결국 카피가 안됐다는 것이다. E메일로 다시 보내는 것으로 해결 보기는 했지만 학회에 시끄러움을 끼쳐서 미안하고 자칫하면 일 년 동안 준비해온 논문을 발표도 못 해볼 번했다.

  MP3도 그러했다. 음악이 없이는 못사는 나지만 그 MP3플레이어에 음악을 넣어주는 작업은 딸애가 했었다. 그래서 떠나기 전날 딸애는 나에게 조작방법을 설명하면서 내가 좋아하는 음악들을 골라서 넣어주었다. 그런데 그 이튿날 충전한다는 것이 어떻게 잘 못해서 SG워너비 앨범 4집이 지워져 버렸다. 그러니 딸애에게 구원을 청할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또다시 지구를 넘나드는 국제 강의가 시작되고 딸애가 전번과 같이 매신저를 통해 나에게 설명에 설명을 거듭했다. 나는 그때야 iTunes와 ipot의 내역이 서로 같다는 도리를 깨치고 다시 음악을 넣을 수 있었다.

  이런 일이 반복되니 나는 딸애가 런던이 아니라 컴퓨터의 화면 저쪽에 사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보고 싶거나 일이 있을 때 인터넷을 켜면 딸애가 화면에 나타나 나를 위로해주고 곤경에 처한 나를 구해주고 …. 우리 언니네 아들은 일본에 처음 유학 왔을 때, 엄마의 전화를 받자 남자앤데도 눈시울이 붉어지던데 우리는 딸애가 도리어 쩍하면 우는 나를 “울지 말아요. 괜찮아요.”하며 위안해준다. 엄마로서 참 부끄럽기도 하지만 그런 엄마를 둔 딸애도 안 됐다는 생각이 든다.

  딸애와 나는 다 같이 B형인데다 둘 다 전형적인 B형 성격을 갖고 있다. 그러나 딸애는 거기에다 A형 남편의 섬세함과 명석한 두뇌도 물려받았다. 소학교 때부터 외국여행을 갈 때면 수속절차나 비행기 갈아타는 방법, 호텔위치도 남편은 딸애에게 설명해주었다. 나는 그저 딸애가 가자는 데로 따라가기만 하면 되었다. 방향감이 전혀 없는 나에게 설명해 줘보았자 소귀에 경 읽기라 여기는 남편이 조금은 괘씸했지만 시끄러운 것이 질색인 나도 마음 편히 똑똑한 딸애 뒤만 따라다니는 것으로 만족했다.

  주변도시학교로 수업하러 다니는 나는 나고야에서 전철을 갈아타는 일이 많다. 나고야 역은 일본에서도 큰 역이라 전철에서 내리면 출구가 대여섯 개가 있고 그 아래로 내려가면 더 많은 입구들이 끝이 보이지 않는 곳까지 쭉 이어져있다. 그 미궁 속에 들어가면 신비한 나라의 아리스 같이 길 잃기 십상인지라 나는 언제나 중앙출구로 나가서, 다시 타야 할 역을 찾아 들어가는데 그 때문에 시간이 배로 걸린다.

  구와나(桑名)시에 갈 때도 그러했다. JR에서 킨테쯔(近鉄)로 갈아타야 하는지라 여느 때같이 중앙출구로 나가서 다시 킨테쯔로 들어갔는데, 돌아올 때 보니 킨테쯔역에서 밖에 나가지 않고도 JR로 직접 통하는 입구가 있지 않는가. 그래서 중앙입구로 가지 않고도 쉽게 갈아탈 수 있었다. 그런데 그 다음날 JR에서 내려 다시 킨테쯔로 통하는 입구를 찾아보니 어찌된 일인지 그 입구가 하루 밤 사이에 사라져 버렸다. 몇 번이고 여기저기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면서 헤맸지만 힘만 빠지고 입구는 끝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갈 때는 별 수 없이 그냥 중앙출입구로 나가서 빙 돌아서 킨테쯔를 타고, 돌아올 때만 그 직통입구로 나와 JR를 탔다.

그러던 어는 날 어느 날 딸애와 같이 나고야에 가게 되었다. 내가 그 미지의 킨테쯔입구 이야기를 했더니 딸애가 배를 끌어안고 웃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그 입구로 나왔을 때 JR 어느 쪽이던가요?”하고 물었다. 생각해보니 전철의 앞 쪽이었다. “그러면 그 반대로 찾아가보세요.” 돌아갈 때 앞쪽이니 갈 때는 뒤쪽일 것일 거라는 거였다. 딸애는 나를 데리고 꼬리 쪽으로 갔다. 그랬더니 정말 그 곳에 킨테쯔입구라고 씌어있는 출입구가 있지 않는가. 거기로 내려가 보니 그렇게 찾아 헤맨 입구가 진짜 거기에 떡 버티고 있었다. 참 바보였다는 생각이 들어 나도 웃고 말았지만 어쨌든 그때부터 딸애 덕에 쉽게 갈아탈 수 있게 되었다.

  똑똑한 딸애가 있어서 내 인생이 얼마나 편한지 모르겠다. 딸애가 있어서 미궁 같은 지하상가에서 쉽게 좋은 가게들을 찾아 쇼핑할 수 있었고 나고야에서 유명한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맛있는 스파게티를 먹을 수 있었고 딸애가 다니는 미용실에 가서 머리를 했고 몇 십 년에 한 번이나 만나는 모네의 전람회에 가서 텔레비전화면에서나 보던 명작들을 직접 볼 수 있었고 <사계절 극단>에서 하는 뮤지컬 <아이다>를 볼 수 있었는데……, 이 모든 것을 나는 따라가기만 하면 되었기에 지금도 그 실내정경은 머리에 환하지만 가는 길은 아리송해서 다시 해보려면 언젠가 딸애가 돌아올 때를 기다릴 수밖에 없다.

  그러고 보면 그동안 딸애는 나에게 있어서 언제든지 무엇이든지 물어볼 수 있는 백과사전이었고 어디든지 안내해주는 내비게이션(navigation)이고 유행을 알려주는 코디네이터이고 내가 보고 싶은 것을 보여주는 리모컨이었다. 그런 딸애가 옆에 없으니 나는 갑자기 바보, 미아(迷兒)가 되어버린 것 같다.

  이제 보니 나는 무엇인가 잡지 않고는 홀로 설 수 없는 그런 사람이었다. 어려서는 막내라 부모님에게 의지하고 그래서 결혼 전에는 양말 한번 안 씻었고 밥 한번 안 해보았고, 결혼해서는 남편에게 의지하고 딸애를 낳아서부터는 딸애에게 의지하고, 그러다나니 내가 혼자서 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게 되었다. 내 주위에 늘 나에게 도움을 주고 아껴주는 가족이 있고 친구들이 있어서 나는 사는데 전혀 부족함을 느끼지 않고 그래서 내가 모자라는 인간이라는 것도 모르고 그렇게 편하고 여유로운 삶을 살 수 있었다.

  내가 걱정 없이 먹고 살 수 있는 돈을 벌어다주고, 세상 룰에 무딘 나에게 일상의 상식들을 가르쳐주고, 아무리 피곤해도 차를 몰고 역까지 마중 나와 주는 남편이 있고, 나의 그 어떤 요구도 얼굴 한번 안 찡그리고 들어주며 친구 같이 늘 옆에 있어주는 딸애가 있고, 사계절 아플세라 먼 이국에서 약을 보내주는 언니와 시누이가 있어서, 거기에다 어떤 고민이라도 들어주고 이러저런 부탁도 거절 없이 들어주는 친구와 동료들이 있어서 내 삶이 참 편하고 윤택이 있었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느끼게 된다.

  예전에 무용가 친구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엄선생이 뭔가 하자고 하면 주위 사람들은 모두 거기에 맞춰 움직여야 한다니깐.”

  확실히 그랬었던 것 같다. 내가 말동무가 필요하다면 친구는 하던 일을 버려두고서라도 나와서 같이 차를 마셔주었고, 내가 마음이 울적해해면 친구들이 모여 술동무를 해주었고, 내가 딸애 생일을 쇠어주겠다면 친구들은 자기애들을 데리고 와서 파티를 열고 축하해 주었다. 내가 유선염 때문에 수술 할 때 의사를 소개해준 것도 친구였고 집에 와서 밥 해주고 청소까지 해준 것도 친구들이었다. 일본에 올 때도 환송연회를 열어주고 밤기차로 심양에까지 바래다 준 것도 친구였다. 몇 년 동안 계속 내 대신 연변작가협회회비를 내주는 것도 친구이고 내 글이 잡지에 실리고 책에 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도 친구들이다.

  ‘딸 떠나기’를 하는 이 시점에서 돌이켜보니 나는 여태껏 늘 받기만 하는 인생을 살아왔었다. 손을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거리에 늘 나를 도와주는 누군가가 있어서 참 쉽게 살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런 삶에서 이젠 딸애가 빠졌다. 물론 아직도 지구 저쪽에서 나를 도와주고 있기는 하지만, 여태껏 딸애가 해주던 많은 일들을 내가 직접 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내가 누구의 도움도 없이 꿋꿋이 사는 그런 위대한 홀로서기를 하겠다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나도 내 주위 사람들에게 무언가 주려는 그런 노력은 해야 하지 않겠는가는 생각을 하게 됐을 뿐이다. 어느 날 내가 옆에 없을 때 그들도 내가 꽤 필요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게 말이다.

  그러려면 나도 주위 사람들에게 눈길을 돌려야 할 것이다. 별로 대단한 것은 못해주겠지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그런 작은 일부터 시작하면 나도 그들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지 않을까.

  그래서 이제부터는 나도 언제든지 그들이 내민 손을 잡아줄 수 있도록 늘 그들이 손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거리에서 그들을 기다릴 것이다.

  ‘딸 떠나기’보다는 나도 무언가 주는 사람이 될 것이다.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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