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5.입시 치르던 날

genteiko 2013. 6. 4. 15:18

 

 

  4년 전, 일 년에 한두 번밖에 안 내리던 눈이 그날따라 새벽부터 흩날리기 시작했다. 마침 그날이 딸애가 센터시험(수능시험) 보는 날이었는데 시험장은 가리야시(刈谷市)에 있는 아이치교육대학(愛知教育大学)에 설립되었었다.

  우리 집에서 차로 한 40분 가야하는 거리인데 딸애 대학입시가 우리 집에서는 제일 중요한 대사였던지라 아침 7시도 안되어 남편이 운전하는 차에 앉아 시험장으로 떠났다. 내가 뒷좌석에 앉은 딸애를 돌아다보며 다시 한 번 수험표체크를 하는데 갑자기 삑- 하더니 차가 휙 돌아갔다. 국도 1호선에 들어서기 위해서는 호형으로 된 긴 다리를 지나야 하는데 간밤에 언 길에서 차가 미끄럼치어 180도로 돌아버린 것이다. 너무 놀라 정신이 다 아득해 나는데 삑- 삑- 하고 뒤에서 차들이 급정거하는 소리들이 들려왔다.

  눈이 잘 오지 않는 곳이라 땅이 어는 법이 없기에 이런 사고는 처음 당하는 일이었다. “괜찮아?!” 딸애 안부부터 확인하고 별일 없는 것을 알고서야 남편은 조심스레 차를 돌려 다시 길을 떠났다.

  이건 불길한 징조가 아니라 액땜을 한 것일 것이야! 이렇게 자아위안 하면서 딸애의 시험이 순리롭기를 기원하던 일이 어제 같은데 어느새 딸애가 4학년생이 되었다. 그때로부터 그 다리를 몇 백번은 지나다녔겠는데 그때마다 그날 아침일이 떠올라 마음이 삐끗한다. 그 정도로 그날 일은 영원한 기억으로 머릿속에 남았다.

  그렇게 호화했던 딸애의 수험일과 달리 나의 수험 날은 너무 평범하고 눈에 뜨이지 않았다. 역사의 새로운 한 페이지를 연거나 다름없이 획기적인, 입시 제도를 회복한다는 등소평의 연설이 있고 그래도 별로 믿음이 안가 한 달이 지나서야 시험공부를 하기로 마음먹고 회사에 한 달 휴가를 신청하고 그렇게 딱 한 달 공부하고 시험 보러 떠난 날이다. 동행해주는 사람도, 차로 실어다주는 사람도 없이 나 혼자 만년필 하나 달랑 들고 타박타박 걸어서 연길시 2중에 있는 시험장으로 갔다.

  초등학교 3학년 때 문화대혁명이 일어났고 그래서 쭉 공부를 못했고 고등학교에 와서야 조금 공부흉내를 냈지만 아버지가 <잡귀신>, <특무>, <반역자>혐의로 반란파들에게 붙잡혀 몇 년이나 감금생활을 해야 했고 온 가족이 깊은 산골에 쫓겨 간 적도 있었고 거기에다 형제들이 다 외국에 있어서 사회적으로 늘 의심받는 대상이었던지라 공청단원, 공산당원들만 추천받는 공농병대학생으로 되는 길은 앞이 꽉 막힌 골목길 같은 것이었다.

  우리 언니는 화룡현에서도 신문에 날 정도로 유명한 <민병표병>이었는데 연변의학원에 추천받았지만 주당위원회 심사에 가서 걸리었다. 하여 현무장부장이 보증을 서고 현위의 특별추천을 받아서야 겨우 공농병대학생으로 될 수 있었지만 결국 의사전업에서 호사전업으로 강직 당했다. 다행히 호사직업이 적성에 맞았던지 대학병원에서 외과간호부장까지 승급해 관록은 얻었지만….

  그러니 대학생이 된다는 것은 나에게 있어서 영원한 이루어질 수 없는 유토피아였다.

  그렇게 사회에 나와서 회사에 들어가고… 그렇게 꿈이 있을 수 없고 또 꿈이 있어서는 안 되는, 그런 2년이 지나 입시제도가 회복되었다. 아직도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도 대학에 갈 수 있는 길이 열리었다는 것이 반신반의한 일이었지만 밑지어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시험공부를 했고 시험 보러 갔다.

  하지만 이름만 수험생이었지 어찌나 무식했는지 문장성분이 무엇인지, 품사가 무엇인지도 몰랐다. 조선어문법이란 배워본 적이 없었으니까 모르는 것이 당연했지만…. 시험 보러 가는 날 아침에 거울 앞에서 머리를 땋으면서 아버지로부터 주어, 술어가 무엇인지를 대충 설명 들었는데 다행히 그것이 그대로 시험에 나와서 금방 알 수 있었다. 문학상식은 워낙 책보기 좋아했었기에 두루 읽어본 책이름과 작가가 나와서 별로 어려운 것이 없었고. 하지만 한 달 내내 공부한 수학, 물리는 문제를 받아보니 별로 알만한 것이 없었다. 수학은 고등학교 3학년 때 마지막으로 배운 해석기하문제 하나만이 풀만했는데 그래도 그것이 25점짜리어서 얼마나 다행이었던지….

  그런 나에 비해 딸애는 참 행운아이다. 딸애가 아직 중학생일 때, 일류 고등학교에 들여보내려고 오후엔 학원에 보내고 저녁엔 가정교사에게서 보충교수를 듣게 해주고 그렇게 해서 지원한 고등학교에 들어간 다음에는 입시학원만 해도 두 곳에 넣어주었다. 선생님의 강의를 직접 들을 수 있는 학원에, 모르는 곳은 컴퓨터로 몇 번이고 돌이켜 볼 수 있는 위성교육학원에서 공부하도록 하였다. 그러니 같은 수험생이라도 나와 딸애의 레벨은 하늘과 땅차이었을 것이다.

  그 대신 빈 백지장 같은 나였던지라 대학교에서 교수님들이 가르치는 지식들이 그대로 머릿속에 선명하게 찍힐 수 있어서 4년 내내 우등생이 되었다. 자칫하면 일생을 무식하게 살아갈 수도 있었던 내가 다시 공부를 할 수 있다는 것이 너무나도 기적 같고 행복하고 눈물 나게 고마운 일이어서, 일학년 때 학급토론회에서 울컥했던 적도 있다.

  이런 대학생활에서 가장 엽기적이었던 일은 신입생인 우리들이 개학하자마자 교실이 없어서(그것이 이유가 되는지 잘 모르겠지만) 방초골이라는 전기도 없는 산골에 내려가 공부를 했다는 것이다. 한창 씨 뿌리는 봄이었던지라 밭일도 많이 했고 석양이 비스듬히 비치는 진달래 핀 산기슭을 흔들거리는 소 수레에 앉아 목청껏 노래를 뽑으며 내려오던 정경이 한 폭의 아름다운 수채화같이 떠오른다.

  그런데 사실 그것이 그렇게 아름답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다. 산골이었던지라 매일 잡곡밥에 미역국만 먹여서 반장이 시찰 내려온 학교지도자들에게 우리가 미역국을 너무 먹어서 빈혈이 오면 책임지겠느냐고 항의할 정도였으니, 그때 격앙된 목소리로 항의하던 반장의 모습이 지금은 코미디같이 떠오르지만, 역사에 두 번 없을 그런 엽기적인 대학생활을 해본 것도 다행이라면 다행일 것이다.

  어떻게 보면 우리 세대는 시대의 불행아이면서도 행운아였다. 불안한 소년기를 지났지만 그래도 너무 늦지 않을 때 대학교에 들어갈 수 있어서, 그것도 입시제도 회복후의 첫 대학생이어서, 그래서 긍지감도 컸고 새로운 경험도 많이 해볼 수 있었다.

  그중에서도 제1차 대학생웅변대회에 나갔던 일이 제일 기억에 남는다. 그 웅변대회에서 내가 일등을 해서라기보다는 학부대표를 추천하는 예심에서 정판룡 교수님께서 나의 웅변고가 그중 논리적이라고 추천해주셨기 때문이다.

  원래 우리 학부에서는 나를 추천할 의사가 없었는데 예심고문으로 오신 선생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모두들 추세를 따라 동의한 것이다. 모든 선견이나 인간관계를 떠나서 단지 원고 하나를 보고 객관적인 평가를 해주신, 그래서 내가 인생을 살아갈 신심을 갖게 해주신 선생님이시기에 나는 지금도 정판룡 선생님의 이름만 떠올려도 마음이 따뜻해진다.

  그리고 내가 테마를 정할 때부터 구체적인 지도를 해주신 담임이시었던 김해룡 선생님, 그분들이 계셨기에 내가 첫 웅변대회 월계관을 따낼 수 있었던 것이다.

  생각해보면 우리가 그분들의 수업을 들을 수 있었다는 것이 얼마나 큰 행운이었는지 모르겠다.

  너무 무식하고 촌스러운 우리들에게 황당파 문학이라는 새로운 경지를 펼쳐보여 주시며 그 유머러스한 강의로 90분 수업이 언제 지나는지 모르게 했던 정판룡 선생님 , 논리란 무엇인지를 자신의 수업으로 가르쳐 주시어서 그 영향으로 내가 문학평론을 하게 해주신 김해룡 선생님, 넌 네가 누구보다 우수하고 멋지다는 것을 잊지 마, 하시면서 늘 격려해주시던 허룡구 선생님, 그리고 조금이라도 더 많은 지식을 우리들에게 전수해주시려 애쓰시던 교수님들…, 그렇게 선생님들의 사랑을 많이 받아서, 학우들 사이에서의 인기는 별로였지만 나름 행복했던 시절이었다.

  불행한 점이라면 소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모두 명색으로만 졸업하다나니 기초가 약한 부실공사 같은 지식구조 때문에 박식한 외국학자들 앞에서 가끔은 한계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는 일, 우리가 대학교를 졸업할 쯤에 대학원제도가 회복되었지만 아직 완전하지 못해서 그해는 문학연구생은 받지 않았고, 그렇게 한 번 기회를 놓치니 다시는 박사공부를 할 찬스가 돌아오지 않아서, 그래서 그것이 일생에 한으로 남은 일?…

  “딱 십년만 늦게 태어났더라면…”

  이런 한탄을 30년을 해왔다. 진짜 십년 늦게 태어났더라면 얼마나 대단한 인물이 되었을지는 모를 일이지만 적어도 박사공부는 착실하게 해보았을 것이다. 내생에는 꼭 박사공부를 해보는 것, 이것이 시대를 맞추어 태어나지 못한 나의 내생에 대한 소망이다.

  전번 달에 졸업25주년 동창회가 열리었는데 나는 여건이 되지 않아 못 갔다. 워낙 사람을 대하는 방법을 잘 모르는 나인지라 학창시절에 친구를 많이 사귀지 못했고, 그래서 벽을 느꼈던 학급친구들이지만 그래도 너무 보고 싶었다. 졸업 후 한 번도 못 본 친구들도 있고. 지금 어떻게 변했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이제 다시 학교에 다니라면 너무 재미있게 그들과 어울릴 것 같기도 한데…. 무리인가?

  또 한 가지 유감이라면 대학교에서 연애를 못해본 일이다. 우리 학급 50명학생중 열 쌍이 부부로 되었으니 그야말로 핑크색으로 물든 교실이었겠는데 나는 뻐꾸기만 날렸으니….

  지금도 미스터리로 생각되는 것은 어쩌면 그 중에 나에게 대시한 사람이 한명도 없었는지 하는 것이다. 내 생각엔 내가 그래도 학교에서 꽤 인기가 있었던 것 같은데…. 캠퍼스커플, 참 낭만적인 그림이다.

대학생활, 하면 서클활동이 가장 추억에 남는 기억이 될 것이다.

  내가 딸애 대학입학식에 갔다가 제일 놀란 것은 몇 백 명의 선배들이 식장 출입구에 쫙 늘어서서 북치고 나팔 불고 플래카드를 들고 서클을 소개하는 전단지를 나누어주면서 서로 자기네 서클에 들어오라고 신입생들을 동원하는 것이었다. 서클종류가 백가지도 넘는데다 얼마나 열정적이고 진지한지, 캠퍼스란 이런 곳이구나 하는 느낌이 확 안겨왔다.

  일본대학교 서클은 스포츠가 위주인 중학교나 고등학교서클과 달리 오락성이 강하다. 우리 딸애도 중학생시절에는 테니스부에, 고등학교 때는 축구서클매니저로 있었는데 대학교에 들어가서는 학교에서 제일 우아하고 화려한 애들을 모아서 세레브리티 (celebrity)하다는 의미로 <디아스(Dias)>라는 서클을 만들었다. 원래 같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선배들이 가끔 볼링이나 하자고 만든 서클인데 딸애가 들어가면서 이름도 활동내용도 싹 바꾸어버린 것이다.

  중학교 때까지는 어떻게 사람들과 어우르는지 잘 모르던 딸애가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는 그 방법을 터득하고 자기 주위에 클래스에서 인기 있는 애들로 그룹을 만들고 대학교에서도 그 그룹을 중심으로 서클을 만들었던 것이다.

  사쿠라 피는 봄에는 하나미(花見), 뜨거운 여름에는 푸른 바다, 하나비(火花)대회, 콘서트…, 눈 내리는 겨울이면 스키장에, 이렇게 즐겁게 떠들썩하게 동아리 친구들과 같이 봄, 여름, 겨울방학을 보내는데 그런 딸애를 보고 있노라면 나의 대학생활은 참 창백했었다는 느낌에 서글퍼지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서클도 없었고 가끔 영화 보러가는 것이 제일 화려한 나들이였다. 다행히 학교에 학생악단이 있어서 따분한 학교생활에 이채를 느낄 수 있었다. 한때는 바이올리니스트로 되려고까지 했었던 나인지라 음악을 할 수 있다는 것이 너무 좋았다.

  학급에서 다른 학생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던지라 악단은 나에게 있어서 현실을 도피하는 도피처같이 아늑한 곳이었다. 이러저런 악기들의 협화음 속에서 아름다운 선율을 만들어가는 것도 참 재미있는 일이었고 음악이라는 공통분모위에서 서로 별로 대화의 필요성 같은 것을 느끼지 않는 것도, 그래서 그곳에 있을 때면 마음이 편안했다.

  그래서 4년 동안 내가 음악실에 있은 시간은 교실에 있은 시간의 몇 배도 될 것이다. 창문 옆에 놓인 피아노, 질서 없이 놓인듯하지만 기실은 제자리를 차지하고 걸상위에 걸쳐있거나 비스듬히 놓인 여러 가지 악기들, 거기에다 가끔 내 눈길을 머물게 하는 남학생도 있었고…. 나름 꽤 낭만적인 그림이 아니었는가 싶다.

  대학에 갔기에 나의 인생이 달라지었고, 조금은 사회에 유용한 사람이 될 수 있었다.

지금은 입시제도가 무거운 족쇄같이 수험생들의 발목을 붙잡는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래도 그래서 우수한 사람들이 선발되어 인재로 자라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옛날처럼 정치사상만 보고 머리 텅 빈 공농병대학생을 만들어내는 제도보다, 일부 사람들 같이 돈만 받고 대학에 받아들여 엉터리 대학생을 키워 나라에 폐를 끼치는 것보다는 힘들더라도 공부를 해서 노력한 사람을 뽑아 육성하는 시험제도가 얼마나 정당한 것인지 모르겠다.

  다만 일본학생들은 센터시험을 보고 또 지원하는 대학에 가서 시험을 치르고, 그것도 일차시험, 이차시험이 있어서 여러 번 기회를 가질 수 있는데 중국학생들은 딱 한 번밖에 시험을 볼 수 없으니 기회가 적은 것이 유감이다. 그래서 그들에게도 여러 번 기회를 주는 그런 입시제도 개혁은 필요하지 않겠는가는 생각도 해본다.

  내가 별 큰 희망을 갖지 않고, 그 대신 별부담도 없이 타박타박 걸어서 시험장에 들어서던 그날로부터 어언간 20여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그사이 시대가 변하고 그래서 입시형식도 변하고 내용도 변하고…, 딸애도 입시 날을 맞았고 무사히 대학에 입학하였다. 딸애의 대학생활에 비해 나의 대학생활은 너무 무색하고 평범했지만 그 곳에 내 청춘의 가장 빛나던 한 페이지가 그려져 있기에 너무 소중해서, 그래서 살포시 그 한쪽 귀퉁이를 드려다 보아도 어느새 마음이 짠해난다.

  너무 평범해서 이야기꺼리도 없는 내 입시 날이 나에게 끊으래야 끊을 수 없는 문학과의 인연을 맺어주었고, 해프닝이 있었지만 무사했던 딸애의 입시 날이 딸애에게 건축가로 되는 첫 걸음을 내딛게 하였다.    

  이렇게 입시 날은 그 사람의 운명을 결정하는 첫 관문이다.

  그래서 세월의 흐름에 따라 그렇게 모든 것이 변해가고 퇴색해 가지만 나에게 4년 대학생활을 선사해준, 내 기억속의 입시 날은 지금도 내 마음속에 선명한 한 폭의 그림으로, 그대로 남아있다.

  좀 흐릿하고 좀 쌀쌀하고 별로 특별함이 없던 입시 치르던 날, 그날은 내 인생의 터닝 포인트였다.

대학입시제도 회복 30돐 (1977년-2007년) 기념문집

『운명을 개변시킨 대학입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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