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7.후회할 수 있는 기회

genteiko 2013. 6. 4. 14:41

 

 

  딸애가 영국으로 유학간지 두주일, 그동안 짐 싼 뒤의 혼잡한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는 딸애의 방도 치우지 않았고, 집 앞 주차장에 세워둔 딸애가 타던 차도 처리하지 않고 그대로 두었었다. 밖에서 들어올 때 문 앞에 있는 차를 보면 딸애가 집에 있는 것 같고 여기저기 널린 옷가지들이 그대로 있으니 언제든지 딸애가 들어올 것 같아서… 그런데 오늘 자동차 도매상에게서 차가 팔렸으니 가지러 오겠다는 연락이 왔다.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차안을 정리해야 했다. 그리고 딸애방도….

  차키를 들고 밖에 나오니 따가운 여름 햇볕이 차 유리에 반사되어 아프게 눈을 찌른다. 아픈 눈을 가리며 자동키 버튼을 누르니 차문이 킥- 열린다. 차안에서 뜨거운 열기가 훅 얼굴에 와 닿는다. 시트위에 던져진 책과 음료수 병, 그리고 CD들을 비닐가방 안에 차곡차곡 넣고 혹시 CD룸에도 남아있는 CD가 있지 않을까 버튼을 누르니, 스르륵 팝송 CD가 나온다. 얼마 전에 나고야에서 돌아오면서 내가 좋아하는 음악이라고 딸애가 이 CD를 넣어주었던 것이다. 그 첫 곡이 <온리유(ONLY YOU)>이었는데 음악이 흐르는 순간 딸애와 나는 동시에 “온리유-”하고 목청을 돋우어 소리쳤다. 시-작도 안 불렀는데 동시에 노래를 부른, 그것도 그렇게 큰소리로, 우리는 서로의 낯을 쳐다보며 하하하 웃음보를 터뜨렸다.

  그러고 보니 딸애가 차를 산지도 삼년이 지났고 그동안 얼마나 많이 이 차에 앉아 다녔었던지…. 같이 쇼핑하러 나고야 사카에(栄)에 이온쇼핑몰에 다니었고, 쉬는 날이면 수업하러 가는 나를 역까지 태워다주고 데리러 오고, 여기저기 전람회, 연극 보러 다니고,…… 딸애와의 많은 추억이 담긴 차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내가 한 번도 딸애차를 닦아준 적이 없었다. 물론 돈을 주면 카센터에서 씻어주지만 단 한 번도 닦은 적이 없다는 것은 그래도 좀 그랬다. 너무 무심했었다는 생각에 미안한 마음이 젖어든다.

  이제는 방을 청소할 차례다. 딸애 방문 앞에 서서 “운이야, 운이야” 이렇게 불러보니 눈물이 솟으며 가슴이 먹먹해진다. 딸애가 내 품을 떠나 멀리 떠났다는 현실이 이제야 실감이 나게 가슴을 쳤다. 매일 두시, 세시가 돼야 자고 그 때문에 아침에는 일어 못 나는 딸애를 불러 깨우며 짜증내고, 그러다나니 급급히 세수하고 옷 갈아입고 나가면 옷가지가 널려있고 침대 위가 뒤죽박죽이 되는데 그것을 보고 또 짜증내고…. 그러고 보니 이러저런 일 때문에 딸애에게 짜증부린 일이 참 많았다. 지금 생각하면 별일도 아닌데,

  “빨리 밥 먹어!”

  “친구 만나러 가지 말고 공부해! 유학 안 갈래?”

  “숙녀는 적어도 앉은 자리 사방 일 미터는 깨끗해야 한다더라! 빨리 안 치워?!”….

  어쩌면 “빨리”라는 말을 이리도 많이 썼을까, 별일도 아닌데 짜증도 많이 냈고 욱 박지르기도 많이 했던 것 같다. 생각해보면 여태껏 별로 부모 속 썩이는 일 없이 소학교, 중학교 모두 우등생이었고 일류 고등학교에 들어가 주었고 국립대학에 들어가 주었고 그래서 학비도 많이 남겨주어 부모 부담도 덜어주었는데 무슨 마음에 안 드는 일이 그렇게 많아서 늘 꾸짖기만 했었던지 모르겠다. 참 후회되기도 하고 안됐다는 생각도 들어 마음이 짠해진다.

  그러고 보면 드라마나 영화 속의 주인공들은 “난 후회 같은 거 할 줄 몰라!”하고 멋지게 말할 때가 많은데 왠지 나는 가슴 저리게 후회되는 일이 수없이 많다. 그때는 느끼지 못해서 무심하게 지나쳐서, 이제는 돌이키려 해도 돌이킬 수가 없어서 혼자서 안타깝고 마음 아픈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지금은 저 하늘나라로 가신 부모님들에게도 그랬다. 일생동안 문학과 예술에 종사하시다나니 정년퇴직 후에도 그 방면에 관심이 많으셨던 아버지, 그해 6.1 아동절에 연길 공원에서 명절을 경축하는 큰 이벤트가 있었다. 사범학생들을 가르치던 때라 그들에게 소학교 집체무용을 보여주려고 학생들을 이끌고 길림에서 연길까지 왔었다. 학생들도 있고 다른 선생님들도 있고 해서 그날 나는 내 한 몸만 챙겨서 공원에 갔다. 그런데 그 이벤트가 보고 싶으셨던 아버지께서 혼자서 공원까지 가실 줄이야.

  그날은 날씨도 유난히 더웠고 어디가나 사람들로 북적이다나니 젊은 사람들도 견디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때 벌써 70고령이던 아버지가 그 인파속에서 무사할리 없었다. 결국 돌아오시다가 큰길에서 쓰러지고 말았다. 그래도 낯모르는 젊은 부부가 구해주고 집까지 부축해 와주어서 불사는 면했지만 부축임을 받으며 집으로 들어오시던 아버지의 모습이 그냥 그대로 가슴에 못 박혔다.

  그날 내가 이벤트를 보고 싶어 하실 아버지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헤아렸었더라면, 그래서 아버지를 모시고 함께 이벤트 장에 갔었더라면, 그런 불상사가 일어날 리가 없었겠는데, 부모의 마음, 부모가 바라는 것 이런 것에 너무나 무디었던 그 시절의 내가 너무나도 원망스럽고 밉다. 그때로부터 20년도 더 지난 지금이지만 가끔 그 때 일이 떠오르면 그날보다 더 진한 아픔이 가슴 저리게 느껴온다. 만약 지금 아버지께서 생전이시라면 집의 차로 가시고 싶어 하는 곳은 다 모시고 다니려만….

  어머니께 죄송스러웠던 일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어머니 때문에 가장 가슴 아팠던 것은 어머니가 화상 당했었던 때의 일이다. 결혼 후 나는 남편을 따라 멀리 길림에 가서 살다보니 부모님은 고향도시에서 언니와 함께 살았다. 꼭 언니가 모셔야 한다는 이유는 없었지만 굳이 찾아보려면 언니네 집이 구들집이어서 편리하고 언니가 대학병원에서 일하니 늙으시고 병약하신 부모님 병 치료하기 쉽고…, 그렇게 언니에게 큰 책임을 떠맡기었으니 언니에게도 미안한 일이다.

  그때 뇌출혈로 인해 정신이 오락가락 하시는 데다 거동까지 불편하셨던 어머니가 어쩌다가 부엌에 있는 뜨거운 가마사이에 끼어 큰 화상을 당하셨다. 전화를 받고 급히 달려간다고 했지만 교통이 불편하던 그때 언니네 집에 도착했을 때는 마침 언니가 같은 병원에서 일하는 의사선생님께 부탁하여 집에서 이식수술을 하는 날이었다.

  호사인 언니가 링거를 꼽고 마취주사를 놓자 의사가 상처에 붙여있던 가제를 뜯었는데 의식이 흐릿하던 어머니가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렀다. 그때 그 정경을 지금 글로 쓰려니 다시금 어머니의 울부짖음 소리가 들리는 듯해서 또 가슴이 아프게 죄어든다. 다른 허벅지 가죽을 벗기어 가위로 조각조각 베어서 상한 부위에 한 조각 한 조각 붙이던 그 장면이 수술에 익숙한 언니에게도 마음 아픈 일이었지만 나로서는 난생 처음 목격하는 일이라 얼마나 충격적이었는지 모른다.

  왜서인지 그 아픔이 시간이 흐를수록 더 깊어지어 가끔 그 일이 떠오르면 숨이 컥 막혀와 가슴을 부여 쥔다. 얼마나 아프고 힘드셨을까. 마음의 상처는 시간이 흐르면 옅어진다고 하지만 그것도 남이 준 상처일 때 하는 말이고 자책감으로 생기는 상처는 시간이 흐를수록 깊어지고 뚜렷해지는 것 같다. 자식으로서의 책임을 다 하지 못해서 부모에게 그런 아픔을 겪게 한 자책감에 참 후회가 막심하다. 영원히 살아계실 부모님인 것도 아닌데 왜 좀 더 자상하게 따뜻하게 돌보아주지 못했을까. 아무리 땅을 치고 후회해도 이 세상에서 딱 한 가지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돌아가신 부모님에게 효도 못한 일이라는 것을 이제야 뼈아프게 느끼니 인간의 우매함이 참 서글픈 일이다.

  조금만 마음 쓰면 쉽게 눈길이 가서 도움을 줄 수 있는 일을 우리는 참 등한하기 쉽다. 부모님에게 진 마음의 빚 때문에 나는 언니 아들을 일본에 데려왔다. 그 애가 일본에 익숙해 질 일 년 동안은 학비도 대주고 집세도 대주었지만 그 뒤는 자기절로 아르바이트를 해서 공부하게 했다. 매년 철이 바뀔 때면 새 옷을 사주고 일용품을 갖춰주고 가끔 반찬을 해주고, 그러는데 그쳤는데 한 번은 언니에게서 그 애가 한 달 피터지게 번 돈을 모두 잃어버렸다는 전화가 왔다. 뭐든지 자기절로 해결하는데 익숙해진 그 애가 우리에게 부담을 끼칠 가봐 알리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그런 조카애에게 전화로 “괜찮니?”하고 물어보고는 괜찮다는 대답에 안심하고 스쳐지나가 버렸다. 이제는 어엿이 일본상사에서 비지너스만으로 일하는 그 애지만 아직 학생이던 그때, 그 한 달이 얼마나 어려웠을까….

  요즈음 와서 지난 그 일이 도리어 새록새록 떠오를 때가 있어서 마음이 아프다. 조금만 마음을 쓰면 그 애의 어려움을 알아차렸었겠는데, 능력 있게 잘해온 것만 믿고 무심히 지나쳐버리다니. 학비, 방세, 식비에, 한 달 수입이 없어지면 당장 생활이 문제였을 텐데, 나의 무심함에 내 마음이 으스스해진다. 며칠 전에 놀러온 그 애에게 “그때 너무 미안했어!”하고 말했더니 “미안은 무슨, 이모도 참, 괜찮아요.” 하며 도리어 나를 위로했다.

  사람은 가까이에 있는 사람에게 무심하기 쉽다. 매일 이러저런 잔소리를 하는 부모님에게, 같이 자란 형제에게, 늘 옆에서 감도는 자식에게, 부르면 언제든지 만날 수 있는 친구에게…, 그들이 옆에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하고 고마운 일인지를 모르고 마치 영원히 같이 있을 것처럼 귀찮다고 부담스럽다고 짜증낸다. 그들을 다시 볼 수 없다는 것이, 그들에게 다시는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는 것이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인지 깨닫지 못하고 말이다. 사실 나는 여태껏 그래왔고 앞으로 또 그럴지도 모른다. 옛날에는 매일 같이 만나던 친구들을 지금은 인터넷을 통해서만 만나니, 그것만으로는 갈증이 가셔지지 않아 가끔 꿈에서 찾아 헤매지만 왠지 연락할 수가 없어서 핸드폰을 들고 조바심치다가 깰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그렇게 친구가 그리운 날이면 그때 그 친구들에게 좀 더 잘해줄걸 하고 후회한다. 친구의 소중함도 친구들을 멀리 떠나보니 이제야 느껴지는데 이제는 그들이 내 옆에 없다.

  후-나오는 한숨소리에 저절로 머리가 흔들어진다. 그렇게 마음을 추스르고 널린 옷가지 주워들 때마다 비어지는 자리에 이런 생각들을 하나씩 채워가는 사이 딸애 방이 점점 깨끗해지고 어느새 모든 것이 정돈되었다.

  책은 책꽂이에 정연하게 꽂히었고 옷은 옷걸이에 줄느런히 걸리어졌고 침대위에는 연분홍 꽃무늬 시트가 곱게 씌어졌다. 이제는 딸애가 돌아올 때까지 이 방은 언제나 이렇게 정돈된 대로, 깨끗한 대로 있을 것이다. 그동안 방안이 지저분하다고 짜증도 많이 냈는데 이제는 그러 필요가 없어졌으니 속 시원해야 할 터인데 정작 이렇게 정돈된 방을 보니 도리어 마음이 허전하다. 옷이고 책이고 여기저기 널려있어도 좋으니 딸애가 그냥 그 방에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걸려있던 옷가지를 다시 땅바닥에 던져보지만 허전한 마음을 채울 수가 없다. 시끄럽고 귀찮은 것이 다 나쁜 일이 아니라는 것이 뼈저리게 느껴진다.

  그래도 딸애는 유학이 끝나면 다시 돌아올 것이고 조카애들도 아직 내 옆에 있고, 비록 멀리에 있지만 소식을 주고받는 친구들도 있으니 다음에는 좀 더 잘해줄 수 있을 것이 아닌가. 설사 또 무심해지고 짜증낼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돌이킬 기회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부모님께만은 이제는 후회막급이다.

  후회란 이전의 잘못을 깨치고 뉘우친다는 말인데, 영원히 돌이킬 수 없다면 후회를 할 수 있는 기회마저 잃어버렸다는 말이 아닌가, 부모님께 다 못한 효도, 나에게 이제 그것은 후회가 아니라 상처일 따름이다. 다시는 나을 수 없는, 다칠수록 덧나는 그런 아픈 상처….

  후회할 수 있는 기회를 영원히 잃어버렸다는 것, 참 슬픈 일이다.

『도라지』, 2009년 6호

'에세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5.입시 치르던 날   (0) 2013.06.04
6.딸 떠나기   (0) 2013.06.04
8.비 내리던 그날   (0) 2013.06.04
9.아버지와 삼촌의 꿈길   (0) 2013.06.04
10.이름일화   (0) 2013.06.04